기대를 버리면 실망도 작아지지만
그만큼 삶이 재미없어진다.
일출 직전의 희미한 안개처럼 조금 슬플 뿐이다.
담담하게...
검색어 '아이리시'에 대한 77 개의 검색 결과
요즘은 일에 거의 파묻혀 지내고 있다.
최근에 꾼 꿈은 모두 일 특히 내가 추진하고 있는 양평동 지식산업센터 PJT와 관계있는 꿈들.
어제 십여차례 잠을 깼는데 꿈속에서 그룹 임원진에게 양평동 PJT의 손익을 설명하는 꿈을 꿨다.
이 한 PJT만 설명하는 자리가 아니라 각자의 순서에 맞춰서 담당자별로 PJT관련 내용을 설명하는 자리였는데
내 순서가 가장 마지막이었다. 앞순서가 진행되다가 잠에서 깨서 '이거 꿈이잖아'하면서 깼는데 다시 잠들면
또 순서가 진행되고 꿈속에서 내 차례를 기다리면서 발표내용을 연습하다 다시 깨서는 '아 왜이러지 꿈인데'
이렇게 계속 반복되다가 결국은 동이 텄다.
얼마 전에는 현장 근처의 민원인 전화를 받아 싸우는 꿈을 꿨고 또 그전에도 이 양평동 PJT와 관련된
꿈들... 맨날 야근하고, 어쩌다 야근없는 날은 어김없이 술마시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요즘
주요 뉴스거리가 무엇인지도 모른채 지내다보니 머리속에 일 외에 다른 것이 없었나보다.
팀장님에게는 '일은 열심히 하는데 질적 측면에서 성과가 부족하다'란 소리를 듣기 일수고
그런 소리 듣고나면 서러워서 혼자 속으로 울고... 일하다보면 시간이 열시가 넘었는데 사무실에는
나 혼자고 다시 서럽고... 이런 일들의 반복이었다. 사실 거의 날마다 속으로 울었다.
'요즘의 내가 좀 위험하지 않나'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이제 술로 스트레스 푸는것도 간이 예전같지
못한지 숙취를 좀처럼 잘 풀어내지 못하고... 어쩐지 마음이 조금씩 병들어가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그렇지만 그래도 이렇게 자각하고 있을때가 그래도 아직 늦지 않은 시기가 아닐까
당분간 술도 좀 자제하고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만한 일을 조금씩이라도 해나가야겠다.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시간조차 사치가 아닐까 싶은게 아직은 내 자신이 온전치 못하다는
뜻이 아닐까. 조금 더 마음에 평안을 가지고 생활해야겠다. 조금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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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다시피 출근하면서 아이폰으로 급히 찍은 사진이라 봄의 느낌을 확실히 살리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봄이 찾아왔나보다. 날씨는 45년만에 가장 추운 4월이라지만 그래도 봄은 봄이다.

다리만 건너면 바로 윤중로인데...
매일 만나는 '야근'이라는 애인이 생긴 이후로는
자정 전에 집에 들어간 적이 드물어 봄이 왔음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흑...ㅠ.ㅠ 이 봄이 가기 전에 진짜 '애인'이 생겼으면 좋겠다. 야근따위하곤 연애하기 싫다...
이상 두서없는 일기 끝~~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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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처럼만에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오후.
폭풍같은 한 달이 지났다. 정신없이 달려가던 읽은 이제 어느정도 마무리.
새벽별과 함께 출퇴근.. 어떤날은 양복조차 갈아입지 않은 채 파김치가 되어
내가 어찌하여 옷조차 갈아입지 못하고 잠이 들었는지 모르던 날도 있었다.
캠퍼스, 사대 뒤 넓은 풀밭이 떠오른다. 드라마 속 한 장면처럼 맑은 바람이 부는 날이면
곧잘 그곳을 찾곤 했다. 책 한권을 낭만삼아 향긋한 바람에 몸과 마음을 모두 맡기고 있으면
이유 없이 마냥 행복했다. 그곳이 아련히 떠오른다. 누워 한 잠만 자면 좋겠건만-
회사 일이라는게 그렇듯이 일을 해내는만큼 내 영혼이 소모되는 것이 안타깝다. 소모되는
영혼만큼 더 인정받겠지. 그렇지만, 어쩐지 더더욱 허기지는 이 기분은 무엇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서점에 가본지가 언제인지...
#. 어렸을 적, 서점은 내 놀이터였다. 초등학생 시절(당시는 호칭이 국민학생이었다.) 하교 후 친구들과
구슬치기, 딱지놀이, 공차기 등등 소소한 놀이거리가 없는 날에는 어김없이 시내 서점으로 향하곤 했다.
지금은 서점마다 손님들이 편히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그러한 공간이
있지 않았다.
형편이 여유롭지는 않았지만 아버지는 책을 사는데 만큼은 아낌없지 지갑을 꺼내셨다.
"다른 것은 빌려서 쓰더라도 책 만큼은 빌리지 말아라. 꼭 사서 한 번 읽고 버려두지 말고 읽고 또
읽어두어라. 두고두고 여러번 읽어야 비로소 네 지식이 된다."
이런 아버지 덕에 원없이 책을 샀고 또 읽을 수 있었다. 이사에 골칫거리가 될 만큼 책장이 늘어갔지만
부모님은 단 한 번도 책을 버리지 않으셨다. 내 영혼은 그렇게 조금씩 살찌워졌다.
#. 쉽지 않았던 형편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의 배려 덕에 비교적 순탄한 유년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낼 수 있었다.
해가 지는줄도 모르고 공을 차다가 수차례 교복 무릎 언저리를 찢어 먹어 어머니께 남들은 이삼년 입는
교복바지를 해마다 사야 한다고 잔소리를 듣기도 했고, 컴퓨터를 들여놓고 나서는 밤새도록 오락을 하다가
들키면 다음날 어김없이 키보드가 사라져 있기도 했다. 0교시가 아니라 -2교시쯤은 될법한 등교시간과
"집에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지금 생각하면 실소가 나올법한 하교 인사를 하고는 잠만 자고 다시 학교인
고3 시절도 묵묵히 잘 보냈다.
오후 무렵의 교실, 주말도, 심지어는 명절조차도 없는 수험생활에 지친 아이들이 모두 잠든 교실
자꾸만 밀려 내려오는 눈을 억지로 부릅뜨고 법정스님의 수필을 읽었다. 창 밖 운동장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뛰노는 소리. 바람이 불어 커튼이 살짝 날리면.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 자체에 감사해야지'
#. 원하던 대학에 합격을 했고(비록 원하던 전공은 아니었으나) 대학생이 되었다. 선배들을 따라서 데모를
나간 적도 있었다. '사수대'를 뛰라는 선배의 권유도 있었으나 겁이 나서 차마 그것까지 하지는 못했다.
종로 한복판에서 경찰들과 밀고 당기는 씨름을 하다가 골목길 곳곳에서 진압봉을 든 경찰들이 뛰어나오면
짝지어준 여선배의 손을 잡고 정신없이 내달리다 어느 빌딩의 화장실에 숨기도 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다가 어느 날 선배에게 "저는 이런 일과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 그렇게 선배를 등지고는
다시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왔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일을 매우 열심히 했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선배들이
좋아서, 그 순수한 모습이 좋아서 쫓아다녔던 것이고 그 순수함이 어느정도 빛이 바래자 좀 더
냉정해졌을 뿐이었다. 운동권이란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한 젊은 시절의 '객기'였던 셈이다.
#. 때가 되어 군대를 다녀오고, 복학생이 되었다. 개인사업을 하시던 아버지는 내가 공무원이나 군인이
되었으면 하셨지만 그러한 의사를 적극적으로 피력하셨던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내가 무엇을 하던
그저 묵묵히 바라보셨다. 중간에 한 해 휴학을 한 것 때문에 동기들은 대부분 먼저 졸업을 했다.
일부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고 대부분의 동기들은 중,고등학교의 선생님이 되었다. 애초부터
선생님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취업준비를 시작했고 손가락안에 꼽을 만한 규모는 아니지만
그래도 대기업이란 범주 안에 들어간다는 회사에 들어왔다. 내가 원하는 부서에 배치해 주었고
열심히 일했다. 사실 내게 있어서 무기란 '성실함'외에 다른 것이 없기도 했다.
#. 몇 번의 이별을 겪었고, 아픈만큼 어느정도는 성숙해졌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사랑이란 것은
나에게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숙제이다. 주면 주는만큼, 느끼면 느끼는만큼 커져갔고 어느 순간
그것이 뻥 터져버리는 날에는 죽을만큼 아파했다. 틀린 문제는 열심히 공부해두면
다음에는 좀처럼 틀리지 않을 수 있었지만 사랑은 그렇지 않았다. 연인 사이의 미묘한 감정의
변화라는 것은 수학공식처럼 풀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더더욱
어렵게 느껴졌다.
#. 활 시위는 당겨졌다. 내일 결과가 잘 나와주면 회사 내에서 가장 짧은 경력으로 매출을 올리는 것이다.
비록 선배들이 하고 있는 몇천억짜리 프로젝트에 비하면 다소 작지만 입사 3년차에 이런 일 하는 것은
내가 처음이라고 다들 기대가 크다. '잘'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열심히' 할 자신은 있다.
최종결재를 받았고, 제출서류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점검했다. 되든, 되지 않든 이제 활은 시위를
떠났으니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득 드는 생각. 나 정말로 행복한가.
다른 생각을 좀처럼 할 수 없게 만드는 바쁜 일상 속에서도 어딘가 모르게 느껴지는 이 허전함.
능력을 인정받는 것. 회사 내에서 그것 만큼 좋은 일도 없겠지만 결국은 나 역시도 큰 조직의
한 부품일 따름이다.
오히려 내가 바라는 것은 오늘도 수고 많았노라고 머리 쓰다듬으며 웃어줄 수 있는 사람.
엊그제 만난 친구들 이야기, 얼마전 읽은 재미있는 신간소설 스토리,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특별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특별한' 사람.
그런 사람과 함께라면 사실 인생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든다.
#0.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냥 서로가 살아오며 형성된 "가장 깊은 곳의 감수성"이 다를 뿐이라고 난 생각한다.
#1. 금요일에는 항상 그렇듯이 부어라 마셔라,
집으로 돌아오는 정신만 빼곤 술집에 다 털어버리고 온다.
어제도 그런 날중에 하나였다.
토요일을 넘어가는 새벽 4시경,
택시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오고 있던 길에 구청 쓰레기 청소차가 지나갔다.
트럭 후미의 봉투 투입구가 윙윙 거리며 회전을 하고 있었고,늙어 주름이 많던 청소부는 트럭 후미의 좁은 받침에 의지한채 차를 타고 있었고,
머리칼 검은, 갓 서른 되어 보이는 한 청소부는 뛰어다니면서 쓰레기 봉투를 집어 투입구에 던져넣고 있었다.
그리고 가끔 쓰레기 봉투가 많이 모인 곳에서는 늙은 청소부도 "탕탕탕"차를 세워
함께 봉투를 집어 트럭에 던져 넣었다.
영등포구청 소속의 기능직 10급 공무원.
월 기본급 828,100원. 야근 수당, 위험 수당, 가족 수당 등을 합쳐 150만원 가량 수령.
(이 돈도 써보면 꽤 큰돈이다.)
갑자기 어젯 밤에 먹은 1인분에 32,000원하던 소고기와 밤새 얻어 마신 삼십하고도 몇만원짜리 발렌타인과 몇천원짜리의 무수한 맥주병들이 생각나며 괜시리 안도감과 함께 억울함이 밀려왔다.
많이 취했었나 보다. 그리고 갑자기 아버지 생각이 났었나 보다.
집 앞 작은 의자에 앉아서 사람 지나다니지 않는 새벽의 밤에 소리내어 울었다.
#2. 우리 아버지도 기능직 9급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셨다.산업재해가 나도 산재처리가 되지 않던 70년대, 사고가 나면 무조건 사망사고였던 현장.그곳에서 지금 내 나이의 아버지는 일을 시작하신거다.
분야나 인원배정 따라 다르지만 기능직 10급으로 시작하면 30년이 지나, 겨우 7~8급으로 끝이 난다.
내가 젊은 청소부를 마주했을때 지난 밤의 비싼 술을 상기하며 안도감과 함께,
뭔가 모를 억울함이 밀려온 것은 결국 가난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내가 살았던 동네는에서 "부자"라고 하는 사람은 "전세나 월세"가 아닌 "자기 집"이 있는 사람이었다. 방 3칸 있는 집이 가장 부자였다. 시장통의 5000원짜리 어설픈 만화주인공 그림의 신발이 아니라, 프로스펙스 매장에서 프로스펙스 운동화를 프로스펙스 스럽게 신는 사람이 부자였다.
연탄가스는 가끔 먹어줘야 하는 것이었고, 당연히 연탄가스 마신날 아침에도 학교는 가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피아노 학원이라는 곳이 있는지는 고등학교 가서 알았고, 상고가면 먹고 사는건 어렵지 않다더라는 아버지의 말씀대로 초등학교 저학년때는 주산학원에 다닌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에 3학년때쯤 아버지의 교통 수단이 자전거에서 citi100 오토바이로 바뀌어서 신나게 타고다닌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우습지만, 쇠락하가던 지방의 중소도시 90년대가 그랬다.
#3.그래도 돈이 많지 않은게 싫었던 적은 있었지만, 가난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것 것 때문에 억울했던 어린 기억은 없었다.
그 젊은 청소부도 3끼 밥을 먹을 것이고, 춥지 않은 집이 있을 것이다.나보다 더 행복하게 토끼 같은 3살짜리 아이와, 미소가 맑은 아내가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가끔은 삽겹살에 소주 한잔 먹을 것이고, 버스나 전철 막차가 끝나고 나면 손을 내밀어 택시를 잡을 것이다.
그리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기뻐했을 것이다.
쇼윈도 속의 멋진 정장을 보면서 가끔 현실을 탓할지 모르지만,토끼같은 이쁜 아이가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하는데, 학원만 보내주고,집에 피아노를 못사주어 미안해할지 모르지만 꽤 괜찮은 삶일 꺼라 생각한다.
"가난해서 힘드시죠?" 라고 물을 수도 있지만
난 사람들의 생명력을 믿는 편이기 때문에
"삶은 꽤 괜찮은 것이죠?" 라고 묻고 싶다.
#4. 절대적 빈곤을 벗어난 사회이다.
굶어서 배고픈 아이들은 있어도 굶어서 죽는 아이들은 없다.
육체적인 생존은 보장받았지만 우리에게 사회적인 생존은 얼마마큼 보장되고 있을까?
가난해도 멋지게 시를 써서 결국 나중에는 돈을 많이 벌었다던 이름난 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너무나 시를 좋아해서 술만 마시면 내가 쓴 시를 읽어보라던 옛 친구가 결국은 가난과 동생 대학학비 때문에 9급 공무원 시험준비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렇고 그런 찌질한 이야기1, 이야기2, 이야기3.....
체육복 자율화 투표에서 비싼 체육복 살 길이 없어서,
조용히 "학교 체육복 유지"에 한표를 보내던 중학교 학생.
자신이 가난하다는 소득증명서를 제출하기 싫어서 밥을 굶겠다고 결심한 초등학교 5학년 아이.
새벽에 배가 아픈데, 아버지 어머니 맞벌이 한다고 잠자는거 깨우기 미안해 참다가 맹장이 터져버린 초등학교 3학년 한 남자 아이.
취직이 안되고 집이 망해서 좋아하던 최지훈을 버렸지만 그래도 결국 스스로 당당한 위치를 차지한 황정음은 꽤 성공적인 케이스이다.
가난 하다는 이유 때문에, 같은 또래가 같은 꿈을 꾸지 못하는 사회.
난 그런 사회에 분노한다.
#5. 예전에 말이 잘통하다고 느꼈던 친하던 친구의
"우리 아버지는 연세대 나와서 서울대에 컴플렉스가 많아. 그런데 너희 아버지는 대학 어디 나오셨어?"
라는 질문에, 이런 가난에 대한 기억은 어떤 개인에게 분노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대학을 나온 어른들이 대부분인 친구의 환경과,
대학을 나온 사람은 2살 많던 형이 처음이었던 집안의 차이는
이제 갓 스물 넘은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또래의 단절들에 대해서 우리는 같은 사회에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답답함이 들었다.
누군가가 그냥 흘려보낸 잉여가 또 누군가에게는 절절한 가슴 속 한이 된다는 사실.
누군가의 끈질길 생명력들이 누군가에게는 찌질한 발악처럼 보여 짜증을 유발한다는 사실.
난 더 이상 가난하지도, 가난때문에 불행하지도 않다. 하지만 이런 단절감들에 분노하며, 슬퍼할 수 밖에 없다.
누군가는 꿈을 꾸지 못할것이라는.그리고 서로가 나누지 못할것이라는.
내 친구는 평생 그 젊은 청소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6. 난 운이 좋은 편이라서, 스스로 원하는 것을 여전히 욕심내며 살고있다.
하지만 지하킥 마지막 편의 신세경의 말처럼,
"내가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가면 또 누군가는 사다리 밑에 있겠구나."가 문제이다.
최장집 교수의 말대로 우리는 권위의 시대를 지나 진정한 자본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출처] http://www.snulife.com/?mid=love&am ··· type%3D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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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수요일(2/3)에 이사합니다.
저야 대학 입학 이후로는 직딩이 된 지금까지 10년간 서울 생활을 해왔지만
부모님과 동생은 그대로 대전에 거주하셨거든요. 남가좌동에서 대전으로 이사한 게 1988년이니까
거의 30년만에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셈이지요.
아버지 가게는 옛 집 근처인 연남동에 위치하고, 이번에 얻은 집은 마포구 창전동입니다. 창전동이라고
하니 어딘지 감이 잘 안잡히는 분이 계실 것 같은데- 그래서 지도 첨부!


6호선 광흥창 역하고는 평소 걸음걸이로는 3분, 출근시의 걸음걸이-_-;; 로는 1분정도 되는 초역세권입니다.
말이 초역세권이지 주변이 아파트만 빼곡한 주거지역이라 동네는 생각보다 조용해요,
베란다에서 안방쪽으로는 약간의 한강 조망도 가능합니다. 예전에 제가 잠시 살았던 성수동처럼 한강 전체의
조망이 들어오는 곳은 아니고.. 정말 아주 조금입니다. 그 조금 보이는 곳에 국회의사당이 위치하더군요.
집에서 신촌까지는 도보로 1km, 15분쯤 되는 거리이니... 앞으로 모임을 할때는 주로 신촌으로 잡을
생각입니다^^ 홍대 놀이터까지도 1km이니... 홍대도 사정권에 들어오고요.
근데 이것 참... 이사오자마자 신촌과 홍대로부터의 거리를 따지는 것 보니 앞으로의 생활이 어떨지
눈에 보이는 듯 합니다.^^; 물론 이제 부모님과 살게 되었으니 함부로 외박을 한다던가, 집에 늦게 들어오면
쫓겨날지도 모르니 일찍 일찍 들어와야지요. 술자리도 좀 줄여야 할테구요.
2년 계약을 했는데, 다음에 이사를 할 때에는 최소한 지금 집보다 조금 더 넓은 평수의 전세를 얻거나
좀 작더라도 서울 안쪽으로 신규분양을 받을 계획입니다. 다시 서울에 둥지를 틀 생각이거든요.
어찌되었건 우리 가족은 거의 30여년만에 다시 서울생활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사실상 고향이나 다름없는
대전을 떠나 서울로 다시 돌아온다는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는데, 내년이면 환갑을 바라보시는 나이에 과감한
결정을 하신 부모님께 감사하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죄송하기도 합니다. 제가 아니었으면 굳이 이런 결정을
하실 분들이 아니었는데...^^
어찌됐건, 네식구.. 아니 업둥이까지 다섯식구네요...^^ 다섯식구 똘똘 뭉쳐서 열심히 살아가려 합니다.
힘 한데 모아서 우리 이름의 집도 다시 마련할 것이고요, 또 장가갈 즈음에는 제 집도 얻어나갈겁니다.
집이 좁아서 초대할 일이 생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정리가 되면 가까운 지인분들
초대하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회사에서 새벽별보며 퇴근하는 일이 잦아져서 한동안 블로그 살림살이 챙기는데 소홀했습니다. 물론
예전에도 포스팅이야 한달에 한 두번 할까 말까 하는 정도였지만- 그래도 자주 들어오긴 했었는데 요샌
완전 관심 밖에 나가있었거든요. 방명록 글 남겨주신 분들에게 답글도 남겨야 하는데...^^; 곧 회신드릴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오늘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아차, 하나 더..!
제가 팀을 옮겼습니다. 하는 일이 크게 달라진건 아닌데요. 땅을 매입헤서 회사 자체사업을 하는 팀이 별도로
꾸려져서 그 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전에 있던 팀에서 하던 일의 일부가 좀 더 전문화된 셈이지요. 회사에서
많은 기대를 하고 있는 팀이니만큼 업무량이 장난이 아닙니다...ㅠㅠ 그래도 잘 해나갈겁니다. 무한도전을 보신
분들은 좀 더 공감하시겠지만, 결국 인생이란 무대 역시 서로의 집념과 집념이 겨루는 자리이니만큼 강한
집념으로 계속 뛰겠습니다. 제가 가끔 지쳐 전화 한 통 하면 내치지 마시고 정겹게 맞아주시고 소주 한 잔
사주세요~! ^^ 그럼 정말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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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보고할 자료를 만들기 위해 사무실에 남아있다. 오늘은 괜시리 퇴근길에
따뜻한 라떼 한 잔 하면서 편안하게 담소를 나누고 싶은데, 남정네들과 마주앉아 차를 마시자니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고, 그렇다고 술을 마시자니 그닥 술이 땡기지는 않는데...
이럴때는 여자친구가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된다면 퇴근 뒤에 잠깐 만나
오늘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제 밤에 본 영화는 스토리는 뻔했지만 액션씬이 볼만했다던지.
지난주에 만난 고등학교 동창 얘기.. 이런 시시콜콜한 얘기들 같이 나눌 수 있으니까....
학창 시절에는 지금보다는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더러는 급만남을 할 수 있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이렇게 저렇게 사회에 진출하고 나니 갈수록 바빠져 서로 시간 맞추어 보기가 어려워졌다.
그리고 바빠지는 만큼 마음속의 허전함과 외로움도 더해간다. 그것을 표현하기는 더욱 어려워지고...
몸도, 마음도 따뜻한 것이 그리워지는데- 따뜻한 라떼 한 잔에 언 마음도 녹을 수 있을지-
오늘 퇴근길에는 모처럼 비싼 커피를 마셔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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